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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무죄추정, 자백강요, 억울한판결)

by hhyun19 2026. 5. 8.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단순한 법정 드라마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때 제 주변에서 꽤 복잡한 일들이 있었고, 누군가 이 영화를 권해줬는데 별 기대 없이 틀었습니다. 다 보고 나서 한동안 멍했습니다. 이건 영화가 아니라 현실 어딘가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으니까요.

일본 형사재판이 보여주는 시스템의 구조

영화의 배경을 이해하려면 일본 형사사법 시스템의 구조를 먼저 짚어야 합니다. 일본의 형사재판 유죄율은 무려 99.9%에 달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여기서 유죄율이란 기소된 피고인 중 최종적으로 유죄 판결을 받는 비율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검찰이 재판에 넘기면 사실상 무죄를 받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구조입니다(출처: 일본 최고재판소).

영화 속 주인공 텟페이는 출근길 지하철에서 성추행 혐의로 현행 체포됩니다. 그리고 경찰 조사가 시작되자마자 수사관은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인정하면 벌금만 내고 끝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처음으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하지 않은 일을 인정하면 끝난다는 말이 어떻게 제안이 됩니까. 그건 제안이 아니라 항복을 강요하는 겁니다.

여기서 핵심은 자백 임의성의 원칙입니다. 이는 피의자의 자백이 고문, 협박, 이익 약속 등 강압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진 경우 그 효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법적 원칙입니다. 그런데 영화가 보여주는 건 이 원칙이 현실에서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입니다. "자백하면 가벼운 처벌", "부인하면 재판까지 간다"는 심리적 압박은 엄밀히 말해 이익 유도에 해당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암묵적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이 구조가 작동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 재판까지 가면 직장을 잃고, 가족에게 알려지고, 사회적으로 낙인이 찍힌다
  • 국선 변호인은 과중한 업무로 개별 사건에 충분한 시간을 쏟기 어렵다
  • 피의자는 수사 초반부터 '범인'이라는 전제 하에 취조를 받는다

텟페이가 선임한 국선 변호사도 처음에는 "유죄 확정 확률이 99.9%"라며 자백을 권유합니다. 결백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변호사가 먼저 포기를 권하는 장면, 저는 이게 이 영화에서 두 번째로 화가 났던 부분입니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원칙으로만 존재하는가

무죄추정의 원칙이란 피고인은 유죄 판결이 확정되기 전까지 무죄로 추정된다는 형사소송의 기본 원칙입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27조 4항에도 명시되어 있고, 일본 헌법 제31조 역시 적법 절차의 보장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원칙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 속 경찰과 검찰은 처음부터 텟페이를 범인으로 단정하고 수사를 진행합니다. 제가 직접 이 장면들을 보면서 느낀 건, 이건 수사가 아니라 기정사실의 확인 작업이었다는 겁니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피해 여중생의 증언이 엇갈리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반복하고, 심지어 듣지도 못했던 말을 들었다고 증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단순히 피해자를 탓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학생도 어떤 식으로든 왜곡된 기억이 형성됐을 수 있다는 걸 압니다. 문제는 그 불확실한 진술이 한 사람의 유죄를 결정하는 핵심 증거로 작동했다는 점입니다.

사건 재현 진술(Event Reconstruction Statement)이란 목격자나 피해자가 사건 이후 기억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진술을 말합니다. 심리학 연구들에 따르면 인간의 기억은 녹화된 영상이 아니라 재구성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거나 반복적인 질문을 받을수록 오기억(False Memory)이 생길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여기서 오기억이란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을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기억하는 현상입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이 문제는 일본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 기억에 너무 선명하게 남아 있는 실제 사건이 있습니다. 김신혜 씨 사건입니다. 2000년 전남 완도에서 발생한 이 사건에서 당시 23세였던 김신혜 씨는 부친 살해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2025년 1월, 광주지법 해남지원은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영장 없는 압수수색, 현장검증 강요 같은 위법 수사가 뒤늦게 밝혀졌습니다. 25년. 한 사람의 청춘과 중년 전체입니다. 텟페이의 독백이 그저 스크린 속 대사가 아닌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 그리고 제 대답

영화의 마지막에 텟페이는 최후 진술에서 이런 말을 남깁니다. 재판은 진실을 밝히는 곳이 아니라, 모아들인 증거를 가지고 임의로 판단하는 장소일 뿐이라고. 저는 이 대사를 듣는 순간 영화 전체가 한 줄로 꿰뚫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게 이 영화를 편하게 추천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구마 2만 개짜리 영화야"라고 말하면 다들 도망갑니다. 그런데 그 답답함을 끝까지 견딘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무게가 이 영화에 있습니다.

솔직히 이 주제는 단순하게 정리되지 않습니다. 무고(誣告) 문제와 성범죄 피해자 보호는 어느 한쪽 손을 들어준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무고란 허위 사실로 타인을 형사 처벌받게 하려는 범죄로, 피무고인의 삶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성범죄 피해자는 수사 과정에서 2차 피해, 즉 피해 사실을 반복적으로 진술하게 만들어 상처를 재경험하게 하는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 문제 모두 실재하고, 둘 다 잘못된 겁니다.

만약 제가 텟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자문해봤습니다. 저는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인정하며 사는 것, 저는 그렇게는 못 삽니다. 그게 더 힘든 길이더라도요.

통쾌한 반전 없이 끝나는 이 영화의 결말이 오히려 정직하다고 느낀 건 바로 그 이유입니다. 진짜 억울한 사람의 현실은 영화처럼 마지막에 깔끔하게 뒤집히지 않으니까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멍했던 제 상태가 어쩌면 이 영화가 의도한 정직한 반응이었던 것 같습니다. 볼 체력이 있는 분이라면, 한 번은 끝까지 보시길 권합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법률 조언이 아닙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5nuc8gZ5wX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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